196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30년 가까이 한국장기계를 주름잡았던 최종윤 국수가 오랜 투병 끝에 지난 2008년 3월, 80세로 생을 마감했다.
장기협회에서는 최초로 유가족들의 국수위패 요구를 받아들여 “國手 최종윤 神位”라는 위패를 제작하여 증정하였고, 삼오제날에는 “현고 학생부군 신위”대신 “국수 최종윤 신위“ 앞에 많은 후배 장기인들이 조문하여 고인을 추모했으며 유족들은 “국수 최종윤 신위“로 제사를 지내도록 배려해준 장기협회에 감사했다.
최9단은 30대인 1960년에 입단하고 2단이 되던 1961년도 대한일보사가 주최한 제1회 국수전에서 임재민 5단을 누르고 우승하여 돌풍을 일으킨 국수가 되고 난후 2회 대회마저도 또 다시 국수가 되어 부산출신 안성흥 4단(초대국수로 1957년도 서울신문사 국수전 우승)에 이어 2대 국수가 되었다.
그 후 최종윤 국수는 불의의 사고로 왼쪽 눈을 실명하게 되었는데 한쪽 눈만으로도 그 만의 독특한 포진을 개발하여 두 눈가진 기사들을 모조리 꺽고 불패의 기사가 되었다. 현재도 최국수 포진이라 불리는 곁마포진이 전문기사들 사이에서는 잊혀지지 않고 사용되고 있으니 가히 한 시대를 풍미했던 국수란 칭호가 아깝지 않다.
일명 “최국수 포진”이 연구되어 실전에서 선보이게 된 배경은 총 대국시간 30분이하의 속기 TV대국에서 후수 일 때 적절히 대응하기 위하여 최종윤 9단이 90년대 초반 이후부터 자주 애용한 포진으로 KBS에서 방영된 최고수전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여 한때 유행하고 연구가 많이 되어 진 포진이다.
최근 들어서 이 포진을 즐겨두는 대표적인 기사로는 김동학 4단(현, 기성)을 들 수 있는데 특히 초반에 눈에 띄는 취약한 약점이 보여지지 않기 때문에 먼저 수비한 후에 공격을 행하는 수비형 기풍기사들에게서 많이 선보여지고 있다.
한국장기계의 영원한 국수였던 故 최종윤 9단의 거침없는 행마는 다신 볼순 없겠지만, 그가 남겨 놓고 간 곁마포진은 장기인들의 기억 속에 잊혀지지 않을 것이며 또한, 장기협회 최초의 국수 위패를 유가족들이 가보처럼 고히 간직하여 정성껏 기재사를 지낼 것이다.